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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갈등과 혐오가 심해졌을까? - 듣지 않는 사회, '토론이 부재한 민주주의 사회'의 명암

by skpygs 2025.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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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의 부재, 감정의 억압, 권위의 개입, 그리고 민주주의의 맹점

한국 사회는 말이 많은 사회다. 뉴스에선 매일같이 논쟁이 벌어지고, 온라인에선 수만 개의 댓글이 쏟아진다. 반국가세력이니, 내란견이니, 배급견이니, 페미니, 일베니, 1찍이니, 2찍이니, 딸피니 뭐니... 하도 혐오 발언이 많아서 다 적지도 못하겠다. 이렇게 혐오 표현이 최근 들어 많이 생긴 나라가 있을까? 친구 사이에도, 가족 사이에도, 정치권에서도 "말"은 넘쳐난다. 그런데도 정작 질문 하나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왜 유독 서로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까?

누군가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곧 대립과 불편함으로 직결된다. 대화는 시작되자마자 논쟁이 되고, 논쟁은 곧 피로감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지 않거나, 말해도 흉내만 낸다. 그리고 이견이 수렴되지 않자 결국 권위나 권력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우리는 선택한다—대화를 피하거나, 수렴을 강제하거나.

물론 서양권이나 유대인들도 토론을 한다. 오히려 그들의 토론이 한국인들보다 더 거칠다. 싸울 기세로 몰아붙인다. 그런데 그들과 한국인들의 차이점은 '수렴되지 않는다는 것' 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개혁을 밀어붙인 후에 시장에 방문하자 상인들이 대통령에게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마크롱은 그에 지지 않고 자신이 왜 연금개혁을 단행해야 했는지, 그것이 프랑스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즉석에서 시만과 토론을 펼치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한국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시민과 정말 쌩으로 날카롭게 토론하는 정치인 말이다.

출처:KBS


 

수렴 불가능 사회, 권위 개입 사회

한국 사회에서 의견은 조율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군가와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토론은 갈등의 출발점으로만 간주되고, 설득은 곧 무력한 반복으로 귀결된다. 서로의 생각은 맞부딪히지 않고,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되풀이된다. 말은 오가지만, 의미는 교차하지 않는다. 토론은 그 자체로 실패한다. 이견은 해소되지 않고, 공감은 도달하지 않으며, 설득은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그 결과, 결국 “무슨 말을 했는가”보다 “누가 그 말을 했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말은 내용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그 말이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위치에서 발화되었는가, 얼마나 권위가 실려 있는가가 설득력을 대신한다. 이는 인터넷에서 가장 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위, 나이, 직책, 경력—이 네 가지가 한국 사회에서 말의 무게를 결정짓는 기준이 된다. 발언의 타당성과 논리보다 그 발언자의 ‘서열’이 사람들을 납득시킨다. “윗사람이 하신 말씀이니 그냥 따르자.” “저분이 몇 년 차인데 왜 자꾸 토를 다냐?” 이와 같은 말은 특정한 조직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정치에서, 일상 대화에서 반복되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이처럼 토론이 실패한 자리에 등장하는 것은 권위의 목소리다. 그 권위는 공동체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필요해서가 아니라, 대화를 포기한 결과로서 작동한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말의 주인이 되고, 군대에서는 상관의 말이 곧 법이 된다. 조직에서는 직책이 높은 사람이 마지막 결정을 내리고, 사회에서는 다수의 눈치와 제도가 말의 내용보다 앞선다. 이런 구조 안에서 ‘다름’은 잠시 허용될 뿐, 끝내 정리된다. 다르다는 사실은 일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접히거나, 조직의 흐름에 맞춰 ‘정돈’되어야 한다. 다름을 끝까지 견디는 구조는 없다. 결국 말은 다수에 의해 덮이거나, 권위에 의해 재단되거나, 혹은 침묵 속에 매몰된다.


우리는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본 적이 없다, 당연하게도...

‘토론’이라는 단어는 교육과정 어디에나 등장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토론의 경험은 드물다. 초등학교에서 토론은 발표 순서 맞추기고, 중학교에선 찬반을 미리 정해 대본처럼 연습한다. 고등학교에선 입시용 평가도구로 전락한다.학생들은 ‘다르게 생각해도 된다’는 메시지를 단 한 번도 온전히 받아본 적이 없다.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말했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부터 걱정한다. '일베' 니 '페미' 니 하는 소리를 들을까봐, 조금이라도 솔직해질 수 없다. 찬성 측이든 반대 측이든 정해진 역할만 수행하는 구조 속에서, 자신의 실제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를 설득하는 경험도, 반대로 설득당하는 경험도 없다.

한국에서 실제 대화란 이렇다. 말을 하면 너무 예민하다는 소리를 듣고, 말을 안 하면 소극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고, 감정적으로 말하면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사회가 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피하고,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듣지 않는 사회는 왜 위험한가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사회는, 결국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는 사회가 된다. 듣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자극적인 말, 가장 극단적인 언어만이 주목을 받는다. 선동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든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은 채 흘러나오고, 이성은 감정을 따라가며 마비된다.

한국인들은 왜 쉽게 선동당하는가? 그것은 토론과 연설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토론과 연설에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과 논리로 승부하는 것이 진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토론과 연설은 감정과 호소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서양인들은 이것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감정 안에서 이성을 본다. "아, 또 저런 전략을 쓰네?" 하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배우지 못한 한국인은 선동과 혐오를 전략과 술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동과 혐오로 받아들인다.

 

혐오, 낙인, 단정, 극단. 이 네 단어가 대화의 자리를 대신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패거리로 구분하고, 의견을 묻기보다는 입장을 강요한다.


감정을 배제하는 교육, 감정에 휘둘리는 사회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감정 없는 이성’을 이상적인 인격의 표본으로 교육해왔다. 학교에서 말은 정리되어야 했고, 주장은 반드시 ‘정답’에 근접해야 했다. 발표 시간에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교사의 기대에 부합하는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야 했다. 이 과정에서 감정은 방해물이었다. 목소리가 떨려도 안 되고, 어휘가 흔들려도 안 된다. 말은 정제된 논리로 포장되어야 했고, 그 속에 감정이 비치면 ‘감정적’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러나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자란 사람은 결국 감정에 휘둘리는 어른이 된다.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을 해석하는 언어도 갖고 있지 않다. ‘왜 저 사람은 화가 났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대신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비이성적이지?’라는 판단부터 내린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사회는, 감정을 다룰 수 없는 사회로 이어진다.

서구 사회의 수사학 교육에서는 로고스(이성), 파토스(감정), 에토스(신뢰)를 설득의 3대 요소로 강조한다. 즉, 효과적인 설득은 이성적 논거뿐만 아니라, 감정적 호소와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 교육은 이를 단순화했다. 이성만이 옳고, 감정은 설득을 방해하는 불순물처럼 여겨졌다. 이로 인해 한국인은 설득을 할 때도, 설득을 당할 때도 감정이 개입되면 진지하지 않다고 느낀다. 웃으며 말하면 가볍게 보이고, 울컥하면 이성을 잃은 것으로 취급받는다. 이 과정에서 감정과 신뢰는 분리된다. 설득의 진정성이 감정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인식이 없다. 감정 표현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말의 깊이도 얕아진다.

이렇게 감정은 억눌리고, 억눌린 감정은 쌓인다. 그리고 억눌린 감정이 결국 터져 나오는 지점은 공공장소가 아니라 익명 공간이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감정이 탈구조화된 채 분출된다. 댓글창, 커뮤니티, SNS 등에서 감정은 조절되지 않고 폭발하며, 타인에게로 향한 혐오나 조롱으로 나타난다. 그 감정은 설득이나 공감의 언어로 채워지지 않았기에, 파괴적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는 감정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을 다루지 못하는 사회, 즉 감정이 지나치게 억눌렸기에 더 취약한 사회가 되었다. 감정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기능을 상실한 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때로 정치적 선동에, 때로 혐오 발언에, 때로는 집단광기의 형태로 표출된다. 그 감정의 언어는 섬세하지 않고, 타인을 설득하지 않으며, 자신도 구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이 문제가 더 심각해졌는가? - 말에 자격이 붙는 시대

한국 사회는 본래부터 권위주의적 질서에 익숙한 사회였다. 나이, 직급, 성별, 학벌에 따라 말의 무게가 달라졌고, 감정은 통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오래된 구조가 지금 들어서 더욱 심화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인터넷과 플랫폼 중심 사회의 등장, 그리고 ‘말에 자격을 부여하는 구조’의 강화다.

인터넷은 말의 문턱을 낮추었지만, 동시에 말에 자격을 부여하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만들어냈다. 더는 "나이가 많아서", "학벌이 높아서"가 전부가 아니다. 이제는 수익 인증, 직업 계급, 팔로워 수, 프로필 배지가 말의 신뢰도를 대신 결정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Toss의 머니라운지다. 사용자는 자신의 자산이나 월소득에 따라 ‘배지’를 부여받고, 그 배지가 발언권과 신뢰도를 좌우한다. 그 배지는 의견을 말할 자격의 상징처럼 기능하며, "이 정도는 벌어야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분위기를 강화한다.

이러한 구조는 디지털 권위주의라 할 만하다. 실제로 디지털 커뮤니티에서도 “그쪽 연봉은 얼마냐?”, “학벌은?”, “그거 해봤냐?” 같은 반응이 댓글 속에서 등장한다. 말을 평가하는 기준이 내용이 아니라 ‘배경’이 되는 순간, 대화는 이뤄지지 않고, 의견은 서열화된다. 이것은 과거의 위계 구조가 디지털 플랫폼을 만나 더 정교하고 투명하게 시각화된 결과물이다. 말의 민주주의는 여기서 무너진다.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모두가 같은 수준의 말로 인정받지는 않는다. 말은 이제 단지 누가 했느냐를 넘어서,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단에 속했느냐, 얼마나 인증할 수 있느냐에 따라 자격이 부여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더욱 말하기를 망설이게 되고, 듣기도 불신하게 된다.


말이 많은데, 대화는 없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할 수 있다’는 것과 ‘말이 통한다’는 것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말할 수는 있으나, 통하지 않는다. 설득도 되지 않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말은 넘치는데, 대화는 없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싸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하기를 피하고, 결국 말하지 않는 방법, 침묵하는 방법, 맞는 척하는 방법만 익숙해진다. 그 틈을 권력과 선동이 파고들며,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된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 - 말의 질서

이제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누군가와 생각이 다르면 이렇게도 불편한가? 왜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설득당하는 것이 이렇게도 드문가? 왜 말로 풀 수 없는 일들이 이렇게 많은가? 우리는 말의 자유는 배웠지만, 말의 질서를 배우지 못했다.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상대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감정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반론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통해 수렴된다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단순하다. 서로의 말을 듣는 연습.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훈련. 이견을 견디는 태도. 우리가 해본 적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이제부터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불편해도 견뎌야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자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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