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21대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는 민주당의 방파제일 뿐인가

by skpygs 2025. 4. 14.
728x90
728x90

윤석열이 민주공화국에서 계엄이라는 자충수를 두고 파면된 뒤에 각 당은 21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경선 준비에 한창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 어떤 때보다 착잡함을 느낀다. 아마도 뭣도 모르던 2017년과 달리 현실적인 문제들을 깨달은 지금으로서는 보수의 몰락이 씁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과거를 고수하는 태도가 아니다. 보수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과 역사적 지혜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모든 급격한 변화에는 예기치 못한 비용이 따르며, 기존 질서와 제도는 그것이 유지되어온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믿음이 보수주의의 토대다. 동시에 보수주의는 자유로운 시장, 작은 정부, 개인의 책임과 자율을 중시한다. 국가는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해서는 안 되며, 시장은 가능한 한 자율적이어야 하고, 안보는 그 모든 기반을 지키는 질서의 최후 보루로 간주된다.

 

필자는 이러한 철학에 공감해 온 사람이다. 진보의 가치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와 ‘책임’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인간과 사회의 균형을 모색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적 관점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해왔다. 그런데 지금 한국 정치에서, 이 입장은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자신이 지지할 만한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감각. 지지하는 정당이 있더라도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말 것이라는 무력감. 그것은 단지 개인의 정치적 고립감에 그치지 않고, 보수주의 자체가 한국 정치 안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스스로를 보수 정당이라 자처하는 큰 정당이 하나 있다. 그러나 그 정당은 과연 보수주의의 철학과 정책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 자유시장에 기반한 성장을 설계하고, 불필요한 국가 개입을 줄이며, 국제 질서 속에서의 실용적 안보를 고민하는 정치, 즉 현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보수정치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필자의 판단으로는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보수정당은 ‘보수’라는 간판을 걸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철학도 설계도, 그리고 방향도 보이지 않는다. 보수가 본래 잘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자유시장 질서를 지키고, 규제보다 창의를 우선하며, 안보에 있어 단호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이 모든 영역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이 정당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인물 대부분은 시대 변화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AI로 대표되는 기술 혁신과 디지털 전환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이 시점에서, 국민의힘 중진 정치인들 중 과연 AI, 플랫폼 산업, 기계학습과 같은 문제를 정책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는 인사가 얼마나 되는가. 이 정당 내부에는 산업 지형의 변화를 경험으로 체득한 인물이 거의 없으며, 담론을 설계하고 관철할 실질적 전문성도 부족하다. 정치권은 여전히 법률 언어에 더 익숙한 인사들로 채워져 있고, 기술 담론은 정책의 중심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이들은 새로운 산업에 대한 논의를 ‘외부 전문가’에게 위임한 채, 기존의 제도 관리와 법조문 해석에만 머물러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는 조문이나 해석의 문제가 아니다. 변화하는 기술과 산업, 세계 질서에 정치가 어떻게 반응하고 선제적으로 제도화할 것인가의 문제다.

한국의 데이터센터 보유량은 한참 부족하다(좌) 네이버 네이터센터(우)

 

게다가 이 정당의 지역 기반 구조는 모든 시도와 실험을 차단하는 병목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치적 생존이 지역구에 결박된 정치인들은, 새로운 정책이 자신의 지역 유권자에게 낯설게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을 때, 쉽게 그 시도를 포기하거나 미룬다. 예컨대 데이터센터 하나 짓는 데에도 지역 여론을 이유로 뒷걸음질치는 일이 벌어진다. ‘전자파’, ‘환경 문제’, ‘투기 의혹’이라는 틀에 갇혀 정당 내부의 어떤 정치인도 이를 능동적으로 방어하지 않는다. 정치인의 설득력이 아닌, 회피가 안전한 전략으로 통하는 상황. 그 사이에서 정책은 멈추고, 정당은 무기력해진다.

 

국민의힘은 한때 이준석이라는 30대, 0선, 이과 출신 인물을 대표로 내세운 바 있다. 그 시도는 단순한 인물교체가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성 정치 구조는 그를 조직의 이물질로 간주했고, 그의 개혁적 접근은 내부의 반발을 초래했다. 물론 이준석 전 대표가 좀 더 노련하게 일을 풀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핵심은 결국 정당의 구조적인 한계다. 이 사건은 단지 특정 정치인의 퇴진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정당이 변화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다는 증거로 남는다. 그리고 그 이후, 이 당은 점점 더 자신에게 익숙한 과거로 되돌아갔다.

 

그 결과, 지금 보수정당 내부에는 설득력 있는 정책도, 미래 산업을 준비하는 전략도, 세대 간 대화를 이끌어낼 담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공천 구조 때문에 독립적으로 발언하기 어렵고, 중진 의원들은 당선만 보장된다면 유권자에게 익숙한 말만 반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 신인 정치인은 구조적으로 발언의 공간이 제한되어 있고, 실질적 정치 참여의 기회는 극히 드물다. 정당 내부에 공론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정치적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사라지고, 당내 문화는 점점 더 폐쇄적으로 굳어진다.

 

이런 구조에서는 정치적 판단이 공공의 이익보다 내부 충성도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최근 특정 초선 의원이 당의 입장과 다른 소신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은 일은, 이 정당이 여전히 관계 중심, 충성 중심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토론의 대체어처럼 쓰이는 조직에서는, 이견은 곧 적대가 되고, 그 속에서 공공의 이익은 뒷순위로 밀려난다. 정치의 본질이 사라지는 지점이다.

 

보수주의가 스스로의 가치를 배반한 사례는 이미 적지 않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역사’에 대한 태도다. 보수는 본래 전통과 역사, 그 축적된 시간을 중시하는 사상이다. 역사는 공동체가 형성한 기억의 집합이고, 그 역사 안에서 국가의 정체성과 공동의 윤리가 도출된다. 그렇기에 보수는 어느 사상보다도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하며,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보수정당은 때때로 역사마저 정치의 도구로 삼는다.

 

독립운동가의 국적을 문제 삼고,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처럼 묘사하려는 시도는, 단순한 사실 왜곡이 아니라 보수주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 훼손이다.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야말로 공동체의 기반이어야 하며, 그 존경심은 진영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여야 한다.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보수, 또는 역사적 진실을 유리하게 재단하려는 보수는 더 이상 보수라 부를 수 없다. 보수주의라는 명칭 아래에서 과거를 폄훼하고, 희생을 정치화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들이 수호하려는 국가의 뿌리를 흔드는 일이다.

 

보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 ‘강한 국가’를 말해왔다. 국가 시스템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유사시에는 질서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치적 행보를 보면 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보수정권이 국가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만천하에 드러낸 사례가 있다. 작년 겨울,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비상계엄이 정말로 실행되었을 때, 사람들은 국가 시스템이 비상 상황에 어떻게 움직일지를 본능적으로 재평가했다. 보수가 말하던 ‘질서’는, 위기 대응이 아니라 권력 유지를 위한 시나리오로 드러났고, ‘안보’라는 말은 일종의 도구처럼 사용되었다.

 

과학기술 정책도 마찬가지다. R&D 예산 삭감이라는 민감한 결정이 이뤄졌지만, 그 과정에서 정부는 충분한 설명이나 논리적 설득 없이 일방적 결정을 밀어붙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부적인 항목에 대해 논쟁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필요했던 것은 투명한 근거와 설득의 노력이었다. 과학기술계와 사회가 제기한 우려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채, 예산 조정이라는 절차적 정당성만 내세우는 방식은, 오히려 보수의 강점이라 믿었던 ‘정책 전문성’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보수주의는 흔히 실력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이념으로 평가받는다. 엘리트 중심의 구성, 제도적 안정성에 대한 신뢰, 변화보다 조정을 선호하는 경향은 모두 그 사회가 일정한 수준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전제에서 가능하다. 그런 구조 안에서는, 보수가 진보보다 더 설득력 있고 논리적일 것을 요구받는다. 더 나아가, 더 나은 언어와 정책으로 사회를 이끌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금의 보수정당 내부에서, 공개 토론이나 정책 논쟁에서 설득력 있게 민주당의 논리를 상대할 수 있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토론은 사라지고, 말은 무

거움을 잃었다.

 

보수는 애초에 철학으로부터 출발한 사상이다. 그리고 철학은 말과 논리 위에 서야 한다. 정치를 구성하는 말, 정책을 설계하는 말, 사회를 설득하는 말. 이 모든 말들 속에 보수의 진심과 비전이 담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정당은 그 말을 잃었다. 설득은 사라졌고, 침묵이나 회피, 혹은 억지스러운 프레임으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스스로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조차 모호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민주당과 정치적 지향이 다른 보수 성향 유권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 없음’을 이유로 이 정당에 표를 던진다. 그것은 지지를 위한 투표가 아니라, 거부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 선택이다. 정치란 지향을 공유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정치는, 특히 보수 정치는, 점점 더 그런 선택이 불가능한 구조로 흘러가고 있다.

 

보수정치가 다시 기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가 대변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시대의 언어로 다시 말해야 한다. 자유시장, 책임 있는 복지, 실용적 안보 같은 개념들이 지금 시대의 기술 변화, 세대 균열,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단순한 정당 명칭이나 구호만으로는 정치의 설득력을 확보할 수 없다. 정치란 결국 설득이다. 그리고 지금 보수는, 설득을 시도하지 않는다.

 

정치는 감정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논리와 신뢰의 공간이다. 보수가 진정으로 다시 유효한 정치세력이 되려면, 지금처럼 상대 진영에 대한 반감만으로는 부족하다. 시장을 어떻게 성장시킬지, 국가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세계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설계와 설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그 정당은 더 이상 보수라 불릴 이유도 없고, 유권자에게 선택될 이유도 없다.

728x90
반응형